맨체스터 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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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맨체스터 더비는 잉글랜드의 축구 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맨체스터 시티 FC 간의 경기를 지칭한다. 1881년 첫 경기가 열렸으며, 1894-95 시즌에 풋볼 리그 경기가 시작되었다. 1970년대 이후 라이벌 의식이 심화되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 두 팀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통산 80승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2022-23 시즌에는 맨시티가 6-3으로 승리하며 역대 최다 득점 경기를 기록했다. 주요 선수로는 웨인 루니, 세르히오 아게로 등이 있으며, 두 팀 모두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한 인물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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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더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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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맨체스터 더비 |
다른 이름 | 해당 없음 |
도시 또는 지역 | 그레이터 맨체스터 |
경기장 |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 (맨체스터 시티) 올드 트래퍼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첫 경기 | 1881년 11월 12일 세인트 마크스 (웨스트 고턴) 0–3 뉴턴 히스 LYR |
최근 경기 | 2024년 12월 15일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시티 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다음 경기 | 2025년 4월 5일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맨체스터 시티 |
총 경기 수 | 195 |
통산 전적 | 맨체스터 시티: 61 무승부: 5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81 |
최다 승리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81승) |
최대 점수차 승리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6 맨체스터 시티 (1926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0–5 맨체스터 시티 (195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0 맨체스터 시티 (1994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6 맨체스터 시티 (2011년) |
최다 득점 경기 | 맨체스터 시티 6–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22년) |
최장 연승 | 8경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93–2000년) |
최장 무패 | 16경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90–2001년) |
현재 무패 기록 | 해당 없음 |
최다 출전 선수 | 라이언 긱스 (36회) |
최다 득점 선수 | 웨인 루니 (11골) |
위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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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 |
관련 문서 | 그레이터 맨체스터의 축구 클럽 목록 |
2. 역사
시티: 하이드 로드(1887–1923), 메인 로드(1923–2003), 시티 오브 맨체스터(2003–현재).
유나이티드: 노스 로드(1878–1893), 뱅크 스트리트(1893–1910), 올드 트래포드(1910–현재).]]
뉴턴 히스 LYR은 1881년 11월 12일 맨체스터 시티의 전신인 세인트 마크(웨스트 고튼)와의 첫 경기에서 3-0으로 승리했다.[1] 1894-95 시즌에는 뉴턴 히스가 맨체스터 시티를 꺾으면서 리그 첫 맞대결이 펼쳐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맨체스터 지역 축구 팬들이 두 팀 모두를 응원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전후 고정적인 서포터가 형성되면서 라이벌 의식이 강화되었다. 특히 1970년대 조지 베스트가 글린 파르도에게 가한 태클로 시티 수비수가 다리를 잃을 뻔한 사건은 이러한 대항심을 더욱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1. 초기 역사 (1881년 ~ 1970년대 이전)
두 팀 간의 첫 경기는 1881년 11월 12일에 열렸는데, 훗날 맨체스터 시티가 되는 웨스트 고튼(세인트 마크스)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되는 뉴턴 히스의 경기였다. 경기는 히스(유나이티드)의 3-0 승리로 끝났다.[1] 당시 두 클럽은 맨체스터 지역의 수많은 신생 팀 중 하나였으며, 이 경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1880년대가 진행되면서 두 클럽 모두 위상이 높아졌고, 1890년대 첫 경기는 "축구계 최고 수준으로 부상하고 있는 \[아드윅(시티)]와 \[뉴턴 히스]가 선두 그룹에 거의 도달한 두 지역 클럽의 만남"으로 묘사되었다.[2] 두 팀은 맨체스터 지역의 지배적인 팀이 되었고, 맨체스터 컵 우승팀은 1888년부터 1893년까지 매년 뉴턴 히스 또는 아드윅이었다. 두 팀 모두 풋볼 얼라이언스에 가입했는데, 풋볼 리그의 단명한 라이벌이었다. 이 기간 동안 두 클럽 모두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뉴턴 히스는 1889년, 1890년, 1891년, 아드윅은 1891년). 1892년에 마침내 풋볼 리그에 가입하게 되었다. 뉴턴 히스는 1부 리그에, 아드윅은 신설된 2부 리그에 합류했다.[3]1894-95 시즌에 두 팀 간의 첫 번째 풋볼 리그 경기가 열렸는데, 뉴턴 히스가 하이드 로드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5-2로 이겼다. 1890년대 후반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형제 빌리와 매튜 길레스피가 세 차례나 이 경기에 서로 다른 팀으로 출전했다.[4][5] 두 클럽 간의 첫 번째 잉글랜드 최고 수준의 경기는 1906년 12월에 열렸는데, 이 경기에서 시티가 3-0으로 승리했으며, 당시 입장 수입은 1000GBP를 넘어섰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큰 액수였다.[6] 당시 시티는 구단이 선수들에게 장부 외 지불을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재정 스캔들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결과, 1904년 FA컵에서 우승한 팀의 핵심 선수들을 포함하여 17명의 선수가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고, 다시는 이 클럽을 대표할 수 없게 되었다.[7] 출전 정지 처분이 1907년 1월에 끝나자 지미 배니스터, 허버트 버지스, 빌리 메레디스, 샌디 턴불 등 4명의 선수가 유나이티드에 합류했고, 유나이티드는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1908년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오늘날의 적대감과는 달리, 이적은 같은 맨체스터 클럽을 돕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환영받았다.[8] 다음 시즌, 턴불은 더비 경기에서 퇴장당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9]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맨체스터의 많은 축구 팬들이 한 주에는 시티 경기를, 다음 주에는 유나이티드 경기를 관람했다. 전쟁 이후에는 더욱 강한 라이벌 의식이 생겨났고, 두 팀을 모두 응원하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1889년 2월 26일에 벨 뷰 애슬레틱 그라운드에서 최초의 야간 조명 맨체스터 더비가 열렸다. 경기장 주변에 웰스 전등이 설치되었고, 10,000명의 관중이 뉴턴 히스가 아드윅을 3-2로 꺾는 경기를 지켜봤다. 이 경기는 하이드 탄광 참사를 돕기 위해 열렸다.[10]
최초의 공식 야간 조명 더비는 1956 FA 채리티 실드 경기였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리그 챔피언이었고, 맨체스터 시티는 FA컵 우승팀이었다.[11] 이 경기는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었는데, 채리티 실드 경기는 일반적으로 리그 챔피언의 홈 구장에서 열렸지만, 올드 트래포드는 아직 조명을 설치하지 못했기에 경기는 메인 로드에서 열렸다.
2. 2. 1970년대의 격화
1970년대 맨체스터 더비에서는 두 건의 논란이 있었다. 1970년 12월 더비 경기에서 맨유의 조지 베스트가 시티의 글린 파도에게 태클을 가해 다리가 부러졌고, 이 부상의 심각성으로 인해 시티 수비수는 다리를 잃을 뻔했다.[12] 다음 시즌, 3-3으로 끝난 흥미진진한 무승부 경기에서 프랜시스 리는 베스트가 다이빙을 했다고 비난했고, 심판에게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극적으로 바닥에 넘어졌다. 1973-74 시즌 첫 더비 경기에서는 마이크 도일과 루 마카리가 레드 카드를 한 장씩 받았고, 경기는 메인 로드에서 0-0으로 득점 없이 종료되었다. 두 선수 모두 경기장을 떠나기를 거부했고, 심판은 두 선수가 퇴장을 받아들일 때까지 양 팀을 탈의실로 돌려보냈다.[13]2. 3. 1980년대 ~ 2000년대: 맨유의 우세
1989년 2월 26일, 벨 뷰 애슬레틱 그라운드에서 최초로 야간 조명 아래 맨체스터 더비가 열렸다. 경기장 주변에는 웰스 전등이 설치되었고, 10,000명의 관중이 뉴턴 히스가 아드윅을 3-2로 꺾는 경기를 지켜보았다. 이 경기는 하이드 탄광 참사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열렸다.[10]최초의 공식 야간 조명 더비는 1956 FA 채리티 실드 경기였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는 리그 챔피언이었고, 맨체스터 시티(맨시티)는 FA컵 우승팀이었다.[11] 당시 채리티 실드 경기는 리그 챔피언의 홈 구장에서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올드 트래포드에는 아직 조명이 설치되지 않아 메인 로드에서 경기가 열렸다.

1973-74 시즌 마지막 날,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경기에서 맨유는 강등을 피하기 위해 승리가 절실했다. 그러나 같은 날 노리치가 버밍엄을 이겨야만 맨유의 경기 결과가 의미 있는 상황이었다. 경기 80분까지 득점이 없던 상황에서 프란시스 리가 골대를 등지고 있던 전 맨유 선수 데니스 로에게 공을 보냈다. 로는 뒤꿈치로 공을 차 골키퍼 알렉스 스텝니를 넘겨 득점에 성공했다. 이 경기는 로의 마지막 리그 경기였고, 그는 곧 은퇴를 발표했다. 경기 막판, 맨유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하여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다른 경기 결과에 따라 맨유가 이기거나 비겼더라도 여전히 강등되었을 것이다.
맨유는 1년 후 1부 리그로 복귀했다. 이후 10년 동안 두 팀은 대체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맨시티는 1976년 리그컵에서 우승했고, 1년 후에는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 맨유는 4시즌 동안 3번의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단 한 번만 우승했다.
2. 4. 2000년대 후반 ~ 현재: 경쟁 심화
1980년대는 맨시티가 1989년 1부 리그로 승격하면서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1989-90 시즌 개막 몇 주 후인 1989년 9월 23일, 메인 로드에서 열린 더비 경기에서 맨시티는 맨유를 5-1로 꺾었지만, 이는 이후 13년 동안 맨유를 상대로 거둔 마지막 승리였다.[18]3. 경기장
(명명권)
(Etihad Stadium|에티하드 스타디움영어)